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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성도

2026.01.31 매일성경 묵상

+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예장합동 소속 교회를 다니는 청년이기 때문에 성경적&교리적& 신학적 오류가 있을 경우 댓글로 남겨주세요~! 묵상 나눔 본문: 창세기 21:22~34 제목: 아브라함의 새로운 모습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20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잘 아는 사이가 된 아비멜렉이 평화의 조약을 맺기 위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온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를 판단할 수 밖에 없었고 아내 사라를 무력하게 빼앗길 수 밖에 없었지만 (물론 원인 제공은 권력 앞에 쫄아가지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에게 있었음.) 이제는 당당하게 조약을 체결한 후에 과거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우물의 권리를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과거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았을 때 이 사실을 아비멜렉에게 알리지 않았고 종들 역시 그 사실을 주인인 아비멜렉에게 알리지 않았다. 분명 그랬었는데 우연이 필연이 되고 빼앗긴 우물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게 된다. 세상은 컴플레인이 매우 익숙하다. 그들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우물을 빼앗긴 것을 왜 알리지 않았을까? 종들이 행한 일이니 그것이 주인의 명령이었을 수 있기에 몸을 사렸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아시고 갚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말한다. 복수는 공의이신 하나님께서 대신 해줄 것이니 상처와 억울함 속에서도 스스로 칼을 쥐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으며 주님의 손에 맡기고 용서를 해볼 것을 권면한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7~21) 성경은 공의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불의는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과 공의의 집행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고백을 요구한다. 그래서 성도의 자세는 “내가 갚겠습니다”가 아닌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용서를 명하신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베드로는 어디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냐고 하며 일곱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다혈질이었기 때문에 일곱도 그에게는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하신다. 계산하면 490번이지만 이는 숫자를 세어가며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다. 490이라는 숫자은 상징적인 숫자로서,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크기를 기억하며 계속해서 용서의 길을 선택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가 정답이라고 해서 아직은 용서할 마음이 없는 다른 이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순간 우리는 언어에 의한 폭력이라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용서는 제3자가 아닌 용서를 구하는 사람과 그 대상의 영역이다. 상처와 분노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대로 남에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주님께 자꾸 가져갈 것을 권면한다. 용서야 말로 심판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라고 인정하는 믿음의 행동이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악을 묵인하거나, 필요한 법적·제도적 절차까지 모두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용서받음=책임을 지지 않아도 됨은 잘못된 공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위의 공식을 참이라고 착각해서 영화 밀양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자신을 면회하러 온 사람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오히려 화를 돋구는 장면들이 나오는 것이다. 다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미움과 복수심이 삶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괴하기보다, 공의를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된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 .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26~27, 30~32) 상처와 억울함을 안고도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선택하겠다는 고백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라 공의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그 상처와 억울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공의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억울하게 빼앗기거나 오해를 받을 때가 반드시 있다. 그때마다 혈기로 맞서기보다 아브라함처럼 지혜롭고 당당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여유가 있기를 소망한다. 내 권리를 주장하되, 상대방의 체면을 살리고 평화를 이끌어내는 브엘세바의 영성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 흐르길 소망한다. 본문으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이 이방 왕에게까지 인정을 받게 되고, 그 증표로 브엘세바에서 언약과 예배가 세워진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2:12~17) 삶의 예배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찬양의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삶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이며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예배자인가? 라는 질문 이후에 삶의 예배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자가 아니라면 삶의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가며 (Coram Deo) 세상에서 나의 잘못된 행동이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죄를 가증히 여기시고 또 미워하시기에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죄성은 우리를 죄로 이끌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경히 여기지 않고 회개하는 자이다. 삶의 예배는 실천과 순종으로 드러난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본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언약은 단순하게 정치적인 합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외부 사람들에까지 드러나는 언약 백성의 삶의 열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화평을 추구하되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 속의 사마리아가 유대인의 경멸을 받는 동네가 되기까지는 수많은 타협이 있었다. 나 하나 정도는 이방 사람과 결혼해도 상관 없다라는 타협이 사마리아를 혐오받는 동네로 만들었다. 물론 예수님은 그 동네로 친히 걸어가셨지만 왜 사마리아로 가시냐고 말리는 제자들에게 혼을 내시지 않으셨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담을 낮추고 문을 열어두되 확고한 기준이 있는 교회이다. 담을 낮추고 문을 열어둘수록 이단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사상이 들어오기도 쉽지만 목회자가 깨어있고 시대를 분별할 줄을 안다면 그런 위험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예비 신학생이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모든 목사님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다.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기르시고 더 이상 점점 악해져가는 이 세상을 방관하거나 악과 권력 앞에 무릎 꿇고 침묵하는 제2의 신사참배를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양심에 따라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목회자를 보며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핵심 구절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창세기 21:24~31) 기도 제목 🙏 1. 억울하게 빼앗기거나 오해를 받을 때마다 혈기로 맞서고 복수하려 하기보다 아브라함처럼 지혜롭고 당당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여유와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용서하는 마음 곧, 브엘세바의 영성이 내 안에 흐르게 하소서. 2.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가며 (Coram Deo) 세상에서 나의 잘못된 행동이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일들을 허락하시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는 인생되게 하소서. 묵상 찬양🎵 https://youtu.be/kdFH0iSBU9I?si=f1uRfbkayYCZjCqM https://youtu.be/8m39xY5PzuQ?si=hGT0ZGcZwuPtWg16 #매일성경 #묵상 #큐티 #QT #기도 #말씀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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